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크루이프 (문단 편집) == 여담 == * 선수 시절 주로 단 등번호는 '팀 에이스 번호'와는 거리가 먼 14번이다. 14번을 달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아약스 시절 동료 게리 뮤렌이 라커룸에서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7번 유니폼을 찾지 못하자 크루이프가 자신의 9번 유니폼을 주고 14번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14번은 AFC 아약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 [[파일:아약스 시절 크라위프 젊은 모습.jpg]]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현역 시절 샤프하게 잘생긴 얼굴로 인기를 끌었다. 다음은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1669/12|송기룡 축협 홍보실장이 처음 크루이프를 알게 되었을 때의 일화]]. *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약스 아카데미에 입단했으나 처음에는 [[야구]]를 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야구를 하기도 했다.[* 사실 네덜란드는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에서 어느 정도 야구가 인기 있는 국가에 속한다. 현재에도 [[MLB]]에는 네덜란드 국적의 선수가 꽤 있는 편이기도 하고 네덜란드 야구 대표팀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2년 연속 4강까지 오르기도 했다. 다만 네덜란드 출신 선수들 대다수는 미국과 비교적 가까운 중남미 네덜란드령 지역인 [[퀴라소]]나 [[아루바]], [[신트마르턴]] 출신이다.] 포지션은 [[포수]]. 그러나 5년 후 코치가 축구를 선택하라고 촉구했고, 그는 [[축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http://www.independent.co.uk/sport/football/news-and-comment/johan-cruyff-dead-14-things-you-didnt-know-about-the-dutch-legend-a6950186.html|#]] 이러한 영향인지 자신이 감독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을 축구에 접목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도 훈련[* 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을 토대로 하는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야구를 축구에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도 야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독 시절 나는 야구의 교훈을 축구에 아주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축구에서 미리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야구도 그렇다. 몇 분의 일 초 사이에 공간과 가능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야구를 잘하려면 주자와 홈 사이 거리를 판단하고 주자가 들어가기 전에 공을 홈으로 보내야 한다. 전술 면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 옳은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을 기술적으로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후략) >---- >'''《마이 턴》(my turn)''' 中 *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스폰서이던 [[아디다스]]가 독일 기업인 것을 알고 세계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한 국가의 기업 스폰은 받을 수 없다면서 나홀로 삼선 유니폼이 아닌 이선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크루이프는 [[푸마(브랜드)|푸마]]의 스폰싱을 받는 선수였고 푸마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아디다스 삼선의 한 줄을 떼고 경기한 것이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푸마 역시 독일 기업이며 창업주들은 형제지간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푸마의 창업자이자 다슬러 형제의 형인 루디가 진성 나치당원이였기에 이 일화가 사실이었다면 크루이프 입장에선 뒷골 땡길만한 셈.] 이는 나중에 크루이프의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했다. *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크루이프 위주로 팀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크루이프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대표격으로 [[PSV 에인트호번]] 소속의 얀 반 베베른과 [[빌리 판데르카윌런]]이 있는데 이들은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다혈질의 '미친 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역시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다. 이를 보던 크루이프는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며 논쟁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저 둘이 어디 말 들으라고 들을 인물들인가. 결국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기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하며, 몇년 후, 크루이프는 이 일화를 밝히면서 마지막 슛은 '''뽀록'''이었다고 자백했다.--그럼 그 전 6번은...-- *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토탈 풋볼]]을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감독이나 선수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특히 선수들은 빡센 체력 훈련에 죽어나는 판국이었다. 정작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은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이며,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토탈 풋볼은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체력을 아끼고 압박 시간을 줄이는 형태의 축구다. 그리고 측면, 중앙 등에서 공을 돌리다 보면 자연적으로 상대의 압박이 거세어져서 볼을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탈압박이다. 탈압박의 전제가 되는 것이 볼을 다루는 기술 즉, 테크닉인 것이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마른 체형 때문인지 '갈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 자신의 축구관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 설화도 자주 일으켰다. 물론 달리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 개인의 신념에 관한 것이니, 몇 번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하고 몇 번은 상대를 관광보내기도 했다. [[파일:external/grafik.rp.pl/675443,698424,16.jpg]] * 크루이프가 완벽히 농락당한 유명한 사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AC 밀란]]과의 결승전이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인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에게 0:4로 완패당하며 드림팀이 붕괴됐다. 게다가 당시 AC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고, [[마르코 반 바스텐]]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겼는지 경기 전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마르셀 드사이|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크루이프의 어록이 떠돌기도 하는데 출처 불분명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글이다. 실제 발언은 요약하자면 "바르셀로나야말로 최고의 우승후보이며, 밀란은 그렇지 못하다. 바르셀로나는 공격적이고, 밀란은 수비적이다.[* 당시 AC 밀란의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오늘날 무리뉴를 연상케 하는 1골 넣고 잠그기 전술을 쓰는 감독이었다.]" 정도의 내용이었다.[* 실제 발언은 "'''밀란이 특별한 점이 없고 수비를 중시한다'''"에 가까운 내용으로 당시 AC 밀란 공격진, 미들진의 [[브리안 라우드루프]], [[마르코 반 바스텐]], [[다니엘레 마사로]], [[데얀 사비체비치]], [[장피에르 파팽]] 등을 생각하면 이것도 밀란 입장에선 디스로 받아들일 수 있긴 하다. 그리고 "우리는 [[호마리우]]랑 계약했고, 밀란은 드사이랑 계약했다. 그거면 설명이 될 것이다"라며 드사이를 지목했는데, 이건 반박의 여지없이 무례한 발언이다.] 허나 결과적으로 특별한 점이 없는 밀란의 공격수 다니엘레 마사로에게 전반에만 2골을 먹고 후반에는 [[데얀 사비체비치]]에게 1골, 마지막으로 [[마르셀 드사이]]에게 1골 먹으며 참패했다. *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를 두고 '''[[안티 풋볼]]''' 드립을 쳤다. 과거 [[첼시 FC|첼시]] 감독 시절부터 무리뉴와 크루이프는 설전이 이어졌는데, 무리뉴한테 "'''[[네놈은 그냥 하루하루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이지|넌 그저 트로피나 수집하는 기계일 뿐이지!]]'''"라고 디스를 걸었고,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2010/11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한 후 "'''난 트로피만 수집하는 감독이 되는 게 참 좋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난 크루이프가 "넌 스페셜 원이 아니라 선수 시절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라고 응수하니 무리뉴는 "'''아직도 과거 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게서는 전혀 배울 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고 크루이프 속을 팍팍 긁었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예전의 브라질과 전혀 다른 수비 축구,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온 [[둥가]] 감독에게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그들은 더 이상 돈 주고 볼만한 가치가 없는 팀"이라는 디스를 날렸다. 이에 둥가 감독은 "싫으면 보지 마라"고 맞디스를 했으나 결국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 본인만의 아트 사커 축구 철학이 얼마나 철저한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조국 [[네덜란드]]조차 그의 비판을 피하진 못했다. 크루이프는 [[스페인]]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결승|결승전]]에 앞서 "나는 당연히 내 조국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한 토탈 풋볼을 그들은 버렸다. 반면 스페인의 축구는 내 축구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축구가 이제 결실을 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했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물론 일부 네덜란드 팬들에겐 대안없이 그저 비난만 하는 늙은이라고 욕도 먹었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축구 스타일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참고로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바티스투타는 특별히 크루이프에게 밉보일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기대 미만의 성적을 내자 바티스투타에게 대놓고 "'''너 때문이다. 바티 너 자체가 패배다'''"라며 디스를 날렸다. 애초에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라며 싫어했다. * 물론 독설만 하는건 아니라, [[에르난 크레스포]]에 대해선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크레스포의 스타일은 현대 축구에서 가장 희귀하다고 평가받는 컴플리트 포워드 스타일이라서 오히려 후대에 고평가받았다. * 2010년대 초 [[http://www.voetbalzone.nl/doc.asp?uid=120620|인터뷰]]에서 친정팀 아약스를 비난했는데, 그 내용이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나의 아약스는 그러지 않아!]]"로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덕후임을 인증했다. * 2014년 들어서 바르셀로나의 축구 스타일 변화에 실망을 표했다. 크루이프는 라포르타 재임 시기인 2010년부터 명예회장으로 있었는데, 산드로 로셀이 취임하면서부터는 구단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로셀이 횡령사건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구단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단이 재정적인 이유로 [[유니세프]] [[로고]]를 포기하거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토탈 풋볼을 손 보려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클럽의 진짜 문제는 팀 내부에 있어야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난 바르사 내부의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구단 내부 복귀를 노리는 듯한데, 결과적으로 구단 내부 복귀는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 2010년대 중반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회장 체제의 바르사 역시 그의 지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네이마르 주니오르|네이마르]]의 이적에 관한 비판도 있었지만, 바르토메우에 대놓고 적대적이었고, 2015년 회장선거 때도 공개적으로 라포르타를 지지했다. 이 움직임에 팬들 사이에서도 간섭이 심하다 vs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다 로 말이 갈렸지만, 이후 바르토메우와 그의 측근들이 '''바르사 역대 최악의 행보'''를 보여주고[* 실제 2016년 크루이프 사후 바르토메우 회장 기간 바르셀로나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크루이프가 죽자 구단 내에서 로셀과 바르토메우 등을 견제할 인물이 없어졌기 때문도 있었다. 다른 레전드인 펩이나 사비, 이니에스타는 외국에, 푸욜은 바르셀로나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지라, 당시 보드진의 깽판을 견제하고 대립하는 건 메시 등 선수단의 몫이 되어버렸다. 결국 메시는 구단의 재정난으로 파리로 떠나버렸고 바르사는 유로파 리그로 떨어졌다. 그나마 챠비가 감독으로 돌아오긴 했다.], 네이마르는 구단과 이사회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브라질 선수 영입건, 주급 관련.] 팬들에게도 빅엿을 먹이고 떠났기에, 결과적으론 크루이프의 말이 옳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 소위 축구계 최고 레전드 선수라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마라도나]]가 딱히 머리가 뛰어난 인상은 아니기 때문에 전술가로서도 대성한 크루이프가 뇌지컬적인 측면에선 유독 특출나 보이는 면이 있다. 펠레 같은 경우는 [[펠레의 저주]]식 망언으로 유명하며 마라도나 역시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판이 많은데 비해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도 대성했고, 무엇보다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놓았다 보니 선수 이후의 커리어까지 생각하면 축구 현역계에선 크루이프가 나름 장수한 인물이긴 하다. * 1991년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찍은 금연 홍보 광고. [youtube(KDLjnkXRZUA)] >'''담배는 축구가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 >그가 출연한 금연 홍보 광고 대사 중에서. 선수 시절부터 매일 20개비씩 피운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결국 1991년 2월 27일에 [[FC 바르셀로나]] 감독 재임 당시 심장우회수술을 받고 난 뒤 금연하여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했지만 이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다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더 받은 후에 [[담배]]를 끊었다. * [[츄파춥스]]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츄파춥스는 카탈루냐 지역을 연고로 한 기업이며, 본사가 바르셀로나에 있다.]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기 위해서 크루이프는 츄파 춥스를 물었고, 이 모습은 TV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리고 2016년 4월 3일, 바르사는 이 날의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크루이프의 추모를 위해 츄파춥스를 건내주기도 했다. * 페예노르트 시절 PSV 선수였던 [[허정무]]와 대결하기도 했다. [[무릎팍도사]]에서 허정무가 과거를 회상할 때 크루이프의 거친 플레이로 코뼈 골절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팬들이 국민 영웅이었던 크루이프에게 야유를 퍼부어 감동을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이천수]]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수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천수가 크루이프 빠돌이라 존경하는 선수를 묻는 질문에 "오직 크루이프"라고 [[기레기|답했더니 "한국 선수들은 존경 안 한다"고 기사가 나왔다.]] * 그의 아들 [[조르디 크루이프]]도 전직 축구 선수로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에서 데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UEFA 유로 1996]]에 뛰기도 하고[* 히딩크 감독이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뛰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다가 라리가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 FC|리버풀]]과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막판 '''골든 자책골'''이 작렬하며 '''5-4'''로 석패했다.] 이름 요르디(Jordi)도 카탈루냐의 성인(聖人)의[* 성 [[게오르기우스]]의 카탈루냐식 표기이다.]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뛰었다.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 FC|마카비 텔아비브]]의 단장 직을 맡고 있다가 현재 [[FC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의 국제 스카우트 이사를 맡고있다. * 뜬금없는 일이긴 한데 그의 사위였던 헤수스 앙고이가 월드리그 [[미식축구]] 리그의 바르셀로나 드래곤스에서 키커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 워크 퍼밋 발급 때문에 이적 과정에서 문제가 한번 발생했는데 워크퍼밋이 나오려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뛰어야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박지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선수 보호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던 경기가 여럿 있었고, 그 결과 64%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머지 방법인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서를[* 즉, 보증인 3명이 필요한 것.][* 영국 축구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리그 등에도 비슷한 워크퍼밋 규정이 있다. 참고로 차두리가 셀틱으로 갈 때 보증인으로 나섰던 건 [[프란츠 베켄바워]]였다.] 받아야 했는데, 원 소속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이적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말고도 1명이 더 필요했는데 박지성과 조금도 접점이 없었던 크루이프가 써줬다. 그 이유는 2004-05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감명받아서'''였다고. 물론 뜬금없이 나선 것은 아니고 같은 국적인 히딩크에게서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크루이프의 평소 남 눈치 보지 않는 성격을 생각하면 꼭 히딩크의 부탁때문에 추천서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고. 어찌됐든 박지성은 워크 퍼밋 발급에 성공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 젊은 시절 모습이 [[루카 모드리치]]와 닮았는데, 플레이 스타일마저 비슷하고, 자신의 조국을 준우승시킨 것까지도 똑같다. 모드리치도 크루이프를 우상으로 삼았을 정도다.[* 그만큼 원래는 바르셀로나의 팬이였으나 토트넘에서 나오려던 당시 바르셀로나는 [[세 얼간이]]가 건재했던 시절이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비교하자면 크루이프는 좀 더 공격적이였고, 모드리치는 [[사비 에르난데스|사비]] 쪽에 가까울 정도로 조율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다. * 2020년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의외로 스트라이커 보직에서 [[호나우두]]에게 밀려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월드컵 우승에 비중을 둔 탓인지 크루이프의 퍼스트팀 탈락을 두고 비교적 무난한 편이라는 타 포지션 대비 가장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준희 해설위원도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http://www.footballi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258|#]]] 물론 호나우두도 전성기가 짧아서 문제였을뿐 전성기 기준으론 퍼스트팀에 들만한 역대급 선수이긴 했고, 세컨드팀도 보면 알겠지만 그 위상이 결코 작진 않다. 결국 자리가 모자라다보니 이런 불필요한 논쟁도 생긴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dorrrr2.jpg|width=100%]]}}} ||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1위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width=100%]]}}}|| * 1978년 첫 은퇴 후 [[AFC 아약스|아약스]]의 기술 고문으로 재임할 당시 아약스가 [[FC 트벤터|트벤터]]에게 1:3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다못해 전반 30분에 벤치로 내려가 당시 아약스의 감독이었던 [[레오 베인하커르]]의 옆에서 직접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를 내리며 팀을 진두지휘해 5:3 역전승을 이끌어낸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탓에 크루이프와 함께 훈련을 하는 선수들은 지적 받고 욕먹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아끼고 기대를 거는 선수에게는 더욱 엄격했다고 하는데 [[마르코 반 바스텐]]은 크루이프에게 독설을 듣고 울면서 훈련장을 나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헤랄트 파넨뷔르흐]]는 이 때문에 팀을 떠났고 [[요니 렙]] 또한 훗날 인터뷰에서 크루이프에게 많은 걸 배웠지만 크루이프의 완벽주의 성향은 싫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완벽주의에, 괴팍한 성격 덕분에 바르사 감독 시절 길들이기 쉽지 않은 유형의 선수들인 '미친 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스토이치코프]]와 'animal' [[호마리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각주] [[분류:요한 크루이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